저는 고3 수능 때 피똥을 쌌습니다. 진짜 제대로 망쳤습니다. 평소에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는 시절이 딱 그 시기이고, 그 때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매우 싫어합니다. 하지만 제가 인생의 큰 교훈을 얻은 시기이기도 해서 이번 글에서 다뤄보려 합니다.
내 지난 1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처음 직감한 건 아마 2교시 수리 영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명칭이 수학 영역으로 바뀌었지만 라떼는 수리 영역이었답니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가르자면, 원래 저는 문과적인 소양이 강한 학생이었습니다. 반대로 수학과 과학에서는 늘 애를 먹었죠. 지금도 저와 처음 대화해 보거나 저를 애매하게 하는 분들은 제가 당연히 문과일 것이라고 생각하더라구요. 그런 학생이 어떤 계기로 인해 고등학생 때 이과를 선택해서 아주 힘든 고등학생 시절을 보냅니다.
어쨌든, 평소에도 수학을 어려워했는데 수능을 보며 ‘아 진짜 X됐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능에서 가장 중요한 멘탈 관리에 실패한 채 수리 영역이 끝났습니다. 다행히 영어는 잘하는 편이라 3교시는 편안하게 넘겼지만 2차 고비가 찾아옵니다. 이미 무너진 멘탈을 회복하기에 3교시 하나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과학탐구 영역도 제대로 말아먹고 제 10대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를 허망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수능이 끝날 때쯤 저희 어머니가 시험장 앞으로 마중 나와 있었지만 저는 못 본 척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제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모두가 사교육에 미친 사람같아 보이는 강남 8학군에 살았지만 너무 운이 좋게도 교육열이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던 부모님을 두었음에도,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충격은 정말 컸습니다.
## 인생은 퍼즐조각
아마 수능을 본 당일 밤이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가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제가 지닌 삶의 태도 중 하나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바로 인생지사 새옹지마입니다.
지금 당장 힘든 일이 닥쳤을 수도 있고, 반대로 정말 기쁜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만 인식되는 그 일이, 내 미래에 어떤 또다른 사건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은 뛸듯이 기쁜 일이 얼마 뒤 나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겪는 고난이 결과적으로 나에겐 더 좋은 열매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느낌으로 반응할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우리는 곧 현재에 서서 뒤를 돌아보며 그 일을 평가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평가는 내가 살고있는 현재에 따라 바뀔 겁니다. ‘그때 그 일이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구나’를 계속해서 깨닫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인생이 퍼즐 조각이라고 했습니다. 조각 하나만 보고서는 전체 그림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여기저기서 맞추다 보면 ‘아, 이 조각이 이 그림의 이 부분을 채우기 위한 거였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수능을 망쳤지만 그로 인해 재수를 하고, 재수를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제 인생에 대해 많은/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저는 지금 제가 가진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를 썩 좋아하는데, 이 중 대부분은 재수를 하며 형성되었습니다. (힘든 만큼 고민이 깊어지기 때문..)
제가 저의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성찰하고 고민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재수 생활이었습니다.
또, 재수를 하고 제가 졸업한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했던 학교 생활이 발판이 되어 쌓아가고 있는 지금의 커리어도 얻지 못했을 수 있구요. 아무튼 제가 깊이 감사해 마다않는 지금의 제 현실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일희일비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겁니다.
Q. 안 좋은 일인 줄 알았던 게 이후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던 경험이 있나요? 그 반대는?